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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생명을 온 세계에전명구 감독회장, 2019 한국교회 부활절 연합예배 설교문
김형준 기자 | 승인 2019.04.21 23:36

부활의 생명을 온 세계에
(시 100:1-5 / 요 11:25-27)
 

전명구 감독회장

인간의 죽음에 대해 평생을 연구했던 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일화입니다. 한 번은 죽음을 앞두고 있는 환자들의 병동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많은 환자가 죽음 앞에서 두려워 떨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어떤 한 간호사가 환자들의 귀에 대고 무어라 속삭이면 모두들 얼굴이 환해지고 기쁨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죽을 때도 평안하게 임종을 맞게 되었습니다. 퀴블러 로스는 궁금하여 그 간호사에게 물었습니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 떨고 있는 환자들에게 무슨 말을 했기에 저들이 기쁘게 임종을 맞이할 수가 있었습니까?" 그때 그 간호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의 좋으신 예수님은 당신의 부활을 약속하셨습니다." 옳습니다. 좋으신 주님은 우리에게 부활을 약속하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축복과 소망이 없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길에서 만나 하는 인사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였습니다. 그러면 상대방도 "그분은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라고 화답하였답니다. 우리도 옆에 있는 분들과 인사하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은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 오늘은 절망과 죽음의 무덤 문을 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영생의 소망을 주신 날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절망을 말하는 날이 아닙니다. 오늘은 죽음을 말하는 날이 아닙니다. 오늘은 소망을 말하는 날입니다. 오늘은 승리를 말하는 날입니다. 오늘은 부활을 말하는 날입니다. 오늘은 영생을 말하는 날입니다.

오늘 본문은 베다니라는 작은 마을에 사는 나사로의 죽음에 관한 말씀입니다. 나사로가 죽은 후 마리아와 마르다는 그의 죽음은 몹시 안타까워하였습니다.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심으로 그의 가족들과 슬픔을 나누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절)” 이 말씀은 굉장한 말씀입니다. 아무도 이런 말을 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이런 말을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그 증거로 죽은 나사로를 그 자리에서 살리셨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썩어 가는 나사로를 "나사로야, 일어나라."라고 하셔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께는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관에 담겨 장례 행렬로 가는 나인 성 과부의 아들도 살려 주셨습니다(눅 7:11-17).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는데, 그 딸도 주님께서 살려 주셨습니다(막 5:35-43). 그리고 주님 자신도 삼 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할렐루야!

1) 부활은 사망의 권세를 이기는 능력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5절에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죽음이 엄청난 힘으로 우리를 공격해 오고 우리를 삼키려 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죽음은 무서운 힘을 가진 실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적이라고 말씀합니다.

죽음은 거대한 파도처럼 우리 인간에게 밀어닥칩니다. 도저히 우리 힘으로 어찌해 볼 수 없는 엄청난 힘으로 우리에게 엄습해 옵니다. 그 놀라운 힘이 무서운 권세로 우리 인생을 짓누릅니다. 독사가 쥐를 사냥할 때 사냥행동은 두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순식간에 공격해서 독을 주입 시킵니다. 다음으로 서서히 독이 몸 안에 퍼져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을 크게 벌려서 통째로 삼킵니다. 고린도전서의 말씀에서 쏘는 것은 뱀이 독니로 무는 것과 같은 것이고, 승리하는 것은 독사가 독 기운에 꼼짝 못 하는 먹이를 삼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망이 승리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사망이 정복해버린다는 것입니다. 저항할 수조차 없도록 우리의 삶 전체를 죄로 물들여 버린다는 것입니다(15:56). 이 무서운 사망의 권세가 지금 이 땅을 호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망의 권세를 이기는 능력인 줄 믿습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대부분 장례가 나면 3일 장을 치릅니다. '3'이라는 숫자를 중요하게 여기는 관습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돌아가신 분이 살아나실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마음가짐에서부터 3일 장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 장례가 시작되고 3일이 지나면 이제 살아날 희망조차 없는 것으로 보면 됩니다.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3일이 지났고, 4일이 지났습니다. 나사로가 살아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나사로를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하시니 죽었던 나사로가 4일 만에 살아났습니다. 살아날 희망조차 없는 때에 나사로가 살아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수많은 사람이 사망의 권세에 짓눌려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 사망의 권세 앞에 인간은 속수무책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절대 이겨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이고,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사망의 권세를 이기는 능력이 우리에게도 생겨지는 줄 믿습니다.

2)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이후에 베다니에 도착하셨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기도해 주셨더라면 오빠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요 11:21). 그러나 주님은 병든 자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생명을 주시는 분이요, 생명 그 자체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25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부활을 주며 생명을 주리라’ 하지 않으시고 ‘내가 곧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주는 분이기 이전에 부활 능력 그 자체입니다. 생명을 주시는 분이기 이전에 생명 그 자체이십니다. 이 말은 예수를 소유하면 이미 부활의 능력을 지닌 자요, 예수를 마음에 모신 자는 이미 영생을 소유한 사람이란 뜻인 줄 믿습니다.

나사로가 비록 죽어서 썩어버렸을지라도 예수님이 그에게 있는 한 그는 살아납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먼 장래뿐 아니라 지금 당장에라도 생명 충만한 삶을 살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수많은 죽음에서 우리를 살려내고 계십니다. 병에서, 전쟁에서, 불의의 사고에서, 재앙에서... 지금도 주님이 우리를 살리고 계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 말은 우리가 육체적으로 죽을지라도 다시 살아난다는 뜻이요, 동시에 육체적으로 살아 있는 금생에서 예수를 믿는 자는 영혼이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 죽음에서의 구원을 약속합니다. 첫째는 육체적 죽음에서의 부활이요, 둘째는 영적 사망에서의 구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사람은 육체적 죽음뿐 아니라 영적 사망에서도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예수님을 소유하셨습니까? 여러분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미 부활의 능력을 소유하셨고, 영생을 소유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는 분으로 믿기 이전에, 예수 자신을 소유하는 것만으로도 무한한 재산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님이 무엇을 주신다고 말하지 않고 ‘내가 곧 무엇이다’라고 스스로 선포하신 말씀을 강조합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라’(6:35), ‘나는 세상의 빛이라’(8:12), ‘나는 양의 문이라’(10:7,9), ‘나는 선한 목자라’(10:11,14),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14:6), ‘나는 참 포도나무라’(15:1,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11:25)’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시어 부활과 생명의 능력을 소유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부활은 계속해서 전해져야 합니다.
나사로가 살아난 것을 본 사람들은 다양하게 반응하였습니다. 첫째는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현장을 목격하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며 놀라운 은혜에 동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요 11:45). 둘째는 예수님의 기적을 부정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믿겠다고 말하지도 못하는 회의적인 사람들입니다(요 11:46). 나사로의 부활을 보고도 예수님을 따른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의 능력을 축소하여 얘기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지막 반응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처럼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예수를 죽이고자 모의하는 사람들입니다(요 11:48).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도 다양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회의적인 반응이어도, 혹은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부활한 예수를 또다시 죽이려고 하는 반응이어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해야 하는 줄 믿습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사건을 통해 예수를 소유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생기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전해야 하는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이 부활절 예배에 나오신 여러분들을 통해 부활의 생명이 온 세계에 전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형준 기자  ccancanj@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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