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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개오와 같은 '감격의 감사'가 남아 있는지요구로동교회 김길진 목사 추수감사절 설교문
김형준 기자 | 승인 2018.11.20 12:01

-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의로움을 주셨고, 삭개오는 거기에 감격했습니다.
- 감사는 기쁨이고, 이 기쁨은 은혜에 대한 깨달음에서 옵니다.
- 감사가 있어야 그리스도인이며, 늘 감사하는 마음이 있으면 성공한 사람입니다.

이 말씀은 구로동교회 김길진 목사님이 추수감사절을 맞이해 설교하신 내용입니다. 감사를 되돌아 보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편집자주>

본문 : 누가복음 19:1-10

김길진 목사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는 것처럼 추수감사절을 시작한 이들은,  영국의 천주교로부터 신앙의 핍박을 받자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생명을 돛을 단 배에 맡기고 대서양을 건너서 당시 신대륙이었던 미국으로 건너온, 신실하며 경건하게 신앙생활하던 개신교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이 한 해 농사를 짓고 나서, 추수한 곡식을 하나님께 드리며 감사예배를 드린 것이 추수감사절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첫 번째 드린 추수감사절은 고난 속에서 나온 감사였습니다 

저들의 감사는 한 해 동안 농사가 잘되었거나, 살아가는 삶이 평안했기 때문에 감사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눈물로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린 이유는 먼저 자기들이 아직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돛을 단 배를 타고 신대륙인 미국으로 건너왔을 때는 1620년 11월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3개월이라는 긴 항해 중에 괴혈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또 미국에 도착해서 일년을 살아가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풍토병으로 죽었습니다. 그 결과 절반의 사람들만 살아남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들의 눈물 젖은 감사는, 먼저 살아남은 것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그들은 한 해 동안 나무를 베어 통나무집을 짓고, 땅을 갈고, 가지고 온 씨를 심었지만, 땅이 영국과 달라서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굶어죽을 위기에서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아 보리와 옥수수를 조금 추수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추수한 옥수수를 놓고, 들에 뛰어다니는 칠면조를 잡아서 구워놓고, 하나님께 추수감사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여러분이 다 잘 알고 있는 ‘삭개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삭개오는 특별한 감사를 하나님께 드린 사람입니다. 그러면 삭개오의 감사는 어떤 감사였는지 오늘 함께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권력과 부를 쥔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했던 이유

먼저 ‘삭개오’ 살았던 시대로 돌아가서 생각해 봅시다. 삭개오는 ‘여리고’라고 하는 큰 도시의 세리장이었습니다. 세리장은 요즘으로 말하면 세무서장입니다. 여리고는 유대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습니다. 그러니까 삭개오는 큰 도시의 세무서장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상당히 출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는 로마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삭개오가 ‘여리고’의 세무서장이었다는 것은 삭개오는 상당히 정치적인 수완이나 능력이 좋았던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의 세무서장은 상당한 권력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대 지역을 다스리는 총독의 입장에서 보면, 이 세리장들을 잘 다스려서 많은 세금을 거둬 로마 황제에게 상납하게 되면, 자기의 능력을 인정받아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총독은 이 세리장들에게 큰 권력을 주어서, 세금을 많이 걷게 했습니다. 그러니 삭개오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당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보면 이 삭개오는 부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삭개오에게 무슨 걱정과 고민이 있었겠습니까? 상당히 행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삭개오에게는 큰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앙과 양심에서 생기는 고민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죄를 짓고 있는 것에 대한 고민이었고, 또한 동족들로부터 로마의 앞잡이, 즉 “민족의 반역자”라는 소리를 듣는 것에 대한 괴로움이었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세리들을 창기와 같은 부류의 죄인으로 취급하고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삭개오의 괴로움과 고민이었습니다. 로마 권력을 이용해서 동족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들이고 있고, 로마 권력을 이용해서 자기 부를 취하고 있는 것에 대한 괴로움과 고민이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고통과 고민을 가지고 살아가던 삭개오에게, 어느 날 예수님께서 여리고 성을 지나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이때 삭개오의 마음 속에는 자기도 예수님을 한 번 만나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생겼습니다. 그러면 삭개오는 왜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을까요? 더 큰 부자가 되기 위해서였을까요? 아니면 더 큰 권력을 얻기 위해서였을까요? 아니면 삭개오에게 무슨 병이라도 있었던 것일까요? 아니었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했던 이유는, 바로 자신의 정신적인 괴로움과 고민 때문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이미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죄인이라도 용서해 주시고,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처럼 세리로 일하던 마태를 제자로 삼았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정말 그 예수님을 한 번 만나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부르시는 예수님, 삭개오에게 ‘의로움’을 주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길로 나가보니, 이미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 나와 있어서 예수님에게 도저히 가까이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삭개오가 어떻게 합니까? 4절입니다.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이런 삭개오의 모습을 여러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는 부자입니다. 그 도시의 세무서장입니다. 또 총독으로부터 신임을 받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지금 돌무화과 나무에 기어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 얼마나 창피한 일이고, 얼마나 망신스러운 모습입니까? / 그런데 지금 삭개오에게 이런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삭개오는 지금 자기에게 찾아온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돌무화과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갔던 것입니다.

이런 삭개오의 마음을 예수님께서 놓칠 리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 나무 아래를 지나가시다가, 발걸음을 멈추고 나무 위를 쳐다보셨습니다. 그래서 삭개오의 눈과 예수님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절입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너의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이름을 묻지도 않고 예수님은 이미 삭개오의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을 묻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름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감격스럽지 않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너는 왜 거기에 올라가 있느냐?”고 묻지도 않았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은 이미 삭개오가 그 나무에 왜 올라가 있는지, 왜 만나려고 하는지, 삭개오의 고민, 그의 괴로움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랬기에 삭개오가 감격한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예수님은 “내가 오늘 너의 집에 가서 하루를 지내야겠다.”는 것입니다. 그의 집은 세리의 집입니다. 온 유대 사람들이 죄인 취급해서 상종하지도 않는 집입니다. 그 당시에는 거지도 세리가 주는 돈은 받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세리의 집에 예수님이 들어가서 하루 밤 지내고 싶다는 것입니다. - 이 엄청난 사랑 앞에 삭개오가 감격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돈을 준 것이 아닙니다. 지식을 준 것도 아닙니다. 더 큰 권력을 준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그가 가장 필요로 하는 의로움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서 함께 지내므로 그를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 이 엄청난 예수님의 사랑 앞에 삭개오가 감격한 것입니다.

삭개오를 부르시는 예수님. 성화의 한 장면

부르신 것만으로도 감격할 일입니다

조선시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반란이 일어나서 임금이 피난을 가게 됩니다. 왕이 변장을 하고, 신하들과 함께 몰래 왕궁을 빠져나와 어떤 시골 마을로 가서, 부자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 시골 부자는 점잖은 어른 몇 사람이 찾아와서 이 마을에서 며칠을 유하겠다고 해서, 정성껏 잘 대접을 했습니다. 몇 달이 지난 후에 반란이 평정되고, 왕이 다시 왕궁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왕궁으로 돌아온 임금이 가만 생각해 보니, 그 시골의 부자가 너무 고마웠습니다. 그래서 그를 불렀습니다. 이 시골 부자가 임금이 부른다고 하니까 깜짝 놀라서 임금 앞에 섭니다. 그런데 임금을 보니, 아니 이 서방이라고 부르던 바로 그 사람이 이 서방이 아니고, 임금인 것입니다. 너무나 놀라서 말을 못하고 있는 그 부자에게 임금이 이렇게 말합니다. “자네가 나를 도와주었으니 나도 자네를 돕고 싶네. 무슨 소원이든지 하나만 말해보게 내가 들어 주겠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벼슬을 한 자리를 달라고 할 수도 있고, 땅을 달라고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촌부의 대답입니다. “아닙니다. 폐하! 저는 바랄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며칠 후에 제 환갑날이라서 환갑잔치를 엽니다. 그때 폐하께서 저희 집에 한 번 더 와 주십시오.” 임금이 이 요구를 거절하겠습니까? “오냐. 그렇게 하겠다.”

이 소문이 금세 사방으로 퍼져나갑니다. 며칠 후에 임금이 이 시골 부자의 환갑잔치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임금과 얼마나 가까운 사이이면 환갑잔치에 임금이 직접 오는 것입니까? 이 시골부자가 대단한 사람이구나. 그래서 이 시골부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많은 사람이 뇌물을 가지고 와서, 이 부자는 금세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이 시골 부자가 참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임금이 우리 집에 오신다. 임금을 한 번 모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내 신분이 달라지는 것이죠.

삭개오의 입장에 보면, 예수님이 자기 집에 오신다는 것은 정말 엄청난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집에 오는 것입니다. - 임마누엘입니다! 그 순간 죄인이었던 삭개오가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9절에 보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 구원이 삭개오의 집에 임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죄인인 삭개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삭개오의 ‘기뻐하는 감사’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으로 들어갈 때 삭개오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먼저, 6절입니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 무슨 말입니까? 삭개오가 엄청나게 기뻐했다는 말입니다. 감사가 무엇입니까?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기쁨이 없는 감사는 감사가 아닙니다. 감사는 기쁨입니다.

자 그런데, 여기서 삭개오가 즐거워하고 기뻐한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물질을 얻었기 때문입니까? 권세를 얻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삭개오의 기쁨은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오신다는 것. 그것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삭개오는 마음을 열었습니다. 마음을 열면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8절입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서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합니다. - 삭개오의 마음이 열렸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참된 감사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참된 감사는 생각에서 옵니다. 영어로 생각이라는 말인 ‘think’와, 감사라는 말의 ‘thank'는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니까 생각이 없으면, 감사를 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어느 방향에서 생각하느냐에 따라 감사가 생기고, 또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 감사가 생깁니다.

잃어버린 것만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로 감사를 못합니다. 그러나 내가 얻은 것을 생각하고, 내가 받은 것을 생각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얼마든지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생각 속에 감사가 있고, 깨달음 속에 감사가 있습니다. 생각이 없거나 깨달음이 없는 사람은 절대로 감사할 수 없습니다.

감사가 있어야 그리스도인입니다

인생이 덧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불교인입니다. 인간의 도리를 깨달으면 유교인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깨달으면 그 사람은 기독교인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지요?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따라서 감사가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감사하지 않고 살 수가 있습니까? /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인  305장이 있지 않습니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고마워…” 이 찬송의 가사는 존 뉴턴(John Newton)이라는 사람이 쓴 것입니다. 이 사람은 흑인들을 잡아서 노예로 팔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 믿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늘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그것 때문에 그는 한평생 복음을 전하며 살았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성공입니까? 내 마음에 늘 감사 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 사람은 성공한 사람입니다. 행복이 무엇입니까? 늘 기뻐하며 살아가는 것이 행복입니다.

오늘 추수감사 주일을 맞이해서, 여러분 마음 속에 삭개오처럼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기쁨이 충만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김형준 기자  ccancanj@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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