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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베데스다에서 일어난 참혹한 일"이승무 목사 영성집회 말씀···경기연회 평신도 수련회에서
김형준 기자 | 승인 2018.07.09 14:01

이 말씀은 이승무 목사(만안교회)가 지난 6월 28일부터 30일까지 열린 남선교회경기연회연합회 주관(회장 유관수 장로) 경기연회 평신도 영성수련회에서 전한 내용입니다. 이 목사님은 38년된 병자가 기대했던 베데스다 연못이 주는 가짜의 본질을 설명하고 진짜 베데스다를 만나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말씀으로 은혜받기 바랍니다.<편집자주>

제목 : 자비의 집에서 일어난 일(요5:1~9)

이승무 목사

본문은 한(恨) 많은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5절에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라고 합니다. 38년 동안 그곳에 있었으니 그의 가족, 이웃, 생활이 어떻게 되었을지 짐작이 갑니다. 모두 떠나고 아무 것도 남은 게 없었겠지요. 그는 어떤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방치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이 성경의 한 구절 속에 이름도, 나이도, 성별도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단지 38년간 병자로 누워 있었다고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한마디로 그 병자의 한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가 있는 자리는 비극, 절망조차도 희망의 노래도 부를 수 없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베데스다에 한 병자가 누워있었다”는 말이 과연 그 병자만의 특별한 이야기일까요? 특별하지만 그러나 일상적인 이야기입니다. 누구나 가슴에는 오랫동안 답답한 것, 해결안 된 것 있습니다. 사연이 없는 사람이 없다고 하는 말이 그 말이겠죠. 저 역시 책을 쓸 정도로 많은 사연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 문제, 노인 문제, 가정 문제 등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이가 얼마나 많은가요. 이런 문제를 안고 젊은이들은 어느새 노인이 되어갑니다.

우리도 38년 환자와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것을 해결해 줄 수 없기 때문에 저는 목회자로서 힘듭니다. 베데스다 환자의 모습 속에서 우리 교인들과 저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영화가 있습니다. 주인공이 한탄하며 마지막 부분에 독백을 하는데 “신은 어떤 방식으로든 내 삶에 찾아올 것이다”라고 합니다. 나이가 들면 사회를 이해할 줄 알았는데, 그런 사회는 없었습니다. 희망적인 메시지는 없고 빈곤이 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날은 명절입니다(요 5:1). 명절은 행복을 얘기할 수 있는 날입니다. 이스라엘은 우리보다도 명절을 더 즐거워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날 베데스다 환자를 만납니다. 복음서 기록자는 왜 명절과 베데스다를 대비시켰을까요?

■ 가짜 베데스다의 참혹함

베데스다의 뜻은 자비의 집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과연 자비의 집인가요? 가짜입니다. 베데스다에는 이름과 달리 실망과 낙담, 절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베데스다는 먼저 들어가는 사람만이 치유가 일어납니다. 병에 걸린 사람이 낳게 되니까 사람들은 이곳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먼저 들어간 자는 치유함을 얻는다”는 말은 역으로 얘기하면 먼저 들어가지 못하면 낫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베데스다는 치유하는 못이지만, 그보다 더 참혹한 결과는 먼저 들어간 자만 치유받는다는 것에 있습니다.

베데스다를 사진에서 보면 베데스다는 인공 연못입니다. 꽤 아래로 내려가야 못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중병 환자와 별로 안 아픈 사람 중 누가 먼저 못에 들어갈 확률이 높을까요? 못이 요동칠 때 먼저 들어가려고 아비규환이 벌어지겠지요. 하지만 힘 있는 사람은 가장 좋은 자리에 진치며 맛있는 것도 먹으면서 있다가 남들 못 들어가게 하고 가장 먼저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래서 38년 동안 이 병자는 한 번도 못 들어간 것입니다. 이 병자에게는 베데스다가 자비의 집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38년간 겪었을 좌절과 아픔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치유받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베데스다에서는 치유받고 찬양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이 병자는 얼마나 한이 맺었을까요? 갈수록 형편 없는 상태가 되어갔을 것입니다. 이 병자보다도 더 악화되어서 베데스다에서는 심지어 연못 근처에는 가보지도 못하고 죽은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베데스다는 수많은 사람들이 실려 오고 실려 나간 곳입니다. 이곳이 과연 자비의 집일까요?

■ 이 세상이라는 베데스다와 진짜 베데스다

베데스다는 결코 자비의 집이 아닙니다. 저주와 고통의 집입니다. 이 세상도 베데스다처럼 절망의 집입니다. 누군가는 행복하다고 하고, 누군가는 잘 산다고 하고, 누군가는 나음을 입었다고 하는데 문제는 내가 아닙니다. 그래서 더 힘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베데스다는 어디에 있는가요? 진짜 베데스다는 어디에서 만날 수 있는가요? 가짜 자비의 집은 많지만 진짜 자비의 집은 없습니다. 그런데 38년된 이 병자가 진짜 베데스다를 볼 기회를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병자는 진짜 베데스다로 바꿀 예수님이 오셨는데도 관심은 물이 언제 동할까에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그러합니다. 우리의 일에 집중하다보면 예수님이 안 보입니다. 주님이 곁에 계신데, 인식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베데스다를 바라보지만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환자를 보자 그의 상태가 어떠한지 바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웃었습니다. 이 질문은 말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병원에 가서 환자에게 “당신은 낫기를 원해요?”라고 묻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살고 싶은데 “살고 싶어?”라고 물을 수 있나요? 병자에게 묻는 질문이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그래서 말이 안 됩니다.

그런데 반응은 더 기가 막힙니다. 7절에 그 대답이 있습니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낫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면 “네”라고 하면 되는데, 나를 넣어줄 사람이 없다고 베데스다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나는 여기에서 죽어갈 가능성이 높습니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물에 먼저 들어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낫는 게 목적입니다. 우리가 왜 살고, 왜 예수님을 믿는가요? 행복하기 위해서? 하늘나라에 가기 위해서? 예수님 믿고 하늘 나라에 가면 됩니다. 그런데 세상은 거짓 베데스다입니다. 그곳에서는 ‘남을 이겨야지’, ‘성공해야지’, ‘차 좋은 거 써야지’에 관심을 두게 합니다.

베데스다는 병을 고치면 목적을 이루는 것인데, 이 병자는 고침받는 것에 대해 이미 좌절하고, 포기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병자는 “한번도 연못에 내려가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그럴 것입니다. 내 가족도 저를 포기했습니다”고 말하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걸 묻지 않았는데도 말이죠. 그는 가짜 베데스다에서 본질을 잊고 산 것입니다.

다시 생각해 보시죠.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주님이 “네가 낫고자 하느냐”, “구원받고자 하느냐”라고 물을 때 “예”라고 하며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남보다 더 잘 살아야 해요.”, “남보다 성공하길 원해요”라고 대답합니다.

8절에서 주님은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라고 하셨습니다. 문제가 해결됐습니다. 우리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가를 봐야 합니다. 눈 앞에 보여지는 문제에 매몰되어 본질을 잃으면 안 됩니다. 세상의 가짜 베데스다에 속으면 안 됩니다. 한 사람의 성공 신화가 우리의 삶을 바꿔줄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대통령이, 스티브 잡스가 행복을 주지 않습니다. 성공이 행복을 주지 않습니다. 그들 자체가 행복한 사람이었는가요? 천국에 들어갔는가요?

세상 성공에 기대는 것은 베데스다 병자가 ‘나을 거야’라고 착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곳이 진짜 베데스다가 되려면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가짜에 속아서 가짜가 주는 것들에 취해서 살아가면 안 됩니다. 요즘 신앙인이 그렇습니다. 좋은 교회가 큰 교회일까요? 아닙니다. 돌아보면 교단다운 교단이 없습니다. 우리는 왜 모이고 왜 신앙생활을 하고 왜 감리교인이 되어야 할까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게 무엇일까요? 우리는 엉뚱하게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지요.

가짜 베데스다가 자비의 집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속아서 먼저 연못에 들어가려고 서로 질시하고 짓밟고 살면 안 됩니다. 베데스다에 빠지면 고통스러운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이 진짜로 중요한지 다시 보고 주님을 다시 만나야 합니다.

“베데스다에 들어갈 거예요”가 아닙니다. “낫기를 원합니다”라고 외치고 일어나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면 됩니다. 베데스다에는 진짜 자비가 없습니다. 상황을 이해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세상이 이해되지도 않습니다. 다만 주님밖에 없습니다. 진짜 베데스다는 주님 나라밖에 없습니다.

김형준 기자  ccancanj@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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